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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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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5년 1월호 재림교회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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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탈족의 ‘케리’

윌리엄 알렉산더 발로는 1862년 4월 3일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나서 27세 때 성공회 선교사로 인도로 건너갔다.1 그곳에서 의사이기도 한 해거트 목사가 이끄는 독립 베델 침례교 산탈 선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해거트 목사는 동인도 철도가 지나가는 잠타라에서 40km 떨어진 마을에서 병원 한 곳과 학교 두 곳을 운영했다.2 윌리엄은 산탈어를 배우고, 5년 뒤 해거트 목사의 딸인 크리스티나(애칭 산탈리)와 결혼했다.3 크리스티나는 1872년 인도에서 태어났는데 J. N. 앤드루스가 최초의 재림교회 선교사로 스위스에 가기 2년 전 일이다.

1896년 D. A. 로빈슨 목사가 해거트 목사의 사역을 참관하러 갔다가 윌리엄에게 캘커타에 갈 일이 있으면 재림교회 선교회에 들러 보라고 권유했다. 윌리엄이 그 말대로 했고 거기서 영어와 토착어로 된 전도지를 접하여 재림교회 가르침을 알게 되었다.4 

몇 년 뒤 윌리엄 부부는 펀자브로 이주해 그곳에서 군목과 일했다. 어느 날 윌리엄은 군목이 재림교회 문서 전도인 I. D. 리처드슨과 안식일을 주제로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윌리엄은 성경을 가져와 리처드슨의 오류를 지적하려 했지만 오히려 성경이 리처드슨의 말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좀 더 공부한 이후 윌리엄 부부는 재림교회에 입교하기로 결심했다. 직장에서 해고된 윌리엄은 엘러리 로빈슨과 함께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5 이듬해(1900년) 윌리엄 부부는 침례를 받고 다시 산탈족을 대상으로 사역하기 시작했다.6


마을을 위해 헌신한 삶

윌리엄 부부는 돈도 땅도 없었고, 동인도 철도가 지나가는 또 다른 마을인 시물탈라 외곽의 반얀나무 아래 천막을 세우고 거기서 3개월을 지냈다. 시물탈라는 유럽인 주택 몇 채와 산탈리 가족 수십 가구가 있는 마을이었다. 윌리엄 부부는 폭풍으로 천막이 무너지고 무서운 콜레라가 창궐하는 데도 살아남았다.

윌리엄은 학생 두 명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신문에 광고를 내고 캘커타에 있는 여러 기업의 후원을 받아 마을에서 2.4km 떨어진 수만 평방미터의 부지를 구입한 다음 교실로 쓸 오두막 몇 채를 지었다. 꽃을 심고 밭을 가꾸었고 과일나무를 길게 줄지어 심었다. 안식일에는 학생들을 이웃 마을로 데려가 찬미가를 부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했다.7 한편 크리스티나는 시간을 내어 캘커타에 있는 재림교회 요양원에 가서 병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웠다.8

아직 접촉하지 못한 이들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윌리엄 부부는 정글에서 14km 떨어진 바부마할로 이사해 큰 초가집을 짓고 학교 겸 교회로 썼다.9 1903년에 윌리엄과 그가 지은 학교는 재림교회 선교회에 소속됐고, 선교회에서는 윌리엄을 선교기지 책임자로 임명했다.10


사회적 약자 위해 일평생 봉사

크리스티나는 마을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봉사했다. 이들은 아플 때면 치료제를 받으려고, 아기 옷이 필요하면 바늘과 실을 받으러, 식량이 없거나 필요한 게 있을 때면 시도 때도 없이 크리스티나를 찾아왔다. 크리스티나는 마을 여성들에게 어머니와 같았고 그의 집은 그들에게 제2의 집과 같았다.11

다른 사람이 언뜻 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윌리엄은 콜레라로 아들과 연이어 아내까지 잃고 울고 있는 남자를 도와 이들을 묻어 주었다. 바로 그 남자가 죽자 윌리엄 부부는 그의 어린 딸을 데려가 교육했다.12 또 카스트 제도를 어겼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쫓겨난 여인 치키아를 거두었다.13 치키아는 가족에게 생명을 위협받았지만 결국 침례를 받고 재림교회 선교회 소속 사역자와 결혼했다.14

윌리엄과 크리스티나는 시간을 내어 코로, 카르마타르, 마도푸르 같은 다른 마을과 도시를 찾아갔다. 장날에는 윌리엄이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군중을 모았다. 힌디어와 산탈어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말했을 때 모인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마다 서적을 주었다.

인도연합회에서 1914년 윌리엄의 은퇴를 가결했을 때 H. R. 솔즈베리 의장은 그를 “산탈의 케리”라고 칭했는데 케리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알려진 윌리엄 케리를 가리킨다. 윌리엄 부부는 1907년에 단 한 번 휴가를 냈다.15 그때 건강을 회복하고, 자녀 교육을 준비하고, 인도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영국 왓퍼드에서 1년을 보냈다.16 은퇴 후 바부마할에 남아 교회가 일부 되돌려준 땅에서 살았고, 자신들이 평생 봉사한 산탈족을 위해 계속 헌신적으로 사역 활동을 펼쳤다.

1926년에 크리스티나가 감염증에 걸렸는데 패혈증으로 발전했다. 치료를 받기 위해 소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정글에서 16km 떨어진 기차역까지 갔지만 안타깝게도 기차에서 숨졌다. 크리스티나가 사망한 뒤 윌리엄은 계속 여기저기 다니며 1940년까지 서적을 배포했고 그때 건강이 악화하여 교회에서는 휴식을 취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은퇴하여 실롱에 있는 산속에서 지내다가 1942년에 사망했다.


1 W. A. Spicer, “A Mission to the Santals,” Review & Herald, July 8, 1902, 13

2 D. A. Robinson, “Among the Santals of India,” Review & Herald, July 14, 1896, 441

3 Freida M. Haegert, “Obituary,” Eastern Tidings, August 5, 1926, 4

4 W. A. Barlow, “How I Became a Seventh-day Adventist,” Review & Herald, Oct 11, 1923, 21

5 L. G. Mookerjee, “Until the Day Dawn,” Eastern Tidings, Nov 15, 1942, 5

6 W. A. Barlow, “How I Became a Seventh-day Adventist,” Review & Herald, Oct 11, 1923, 21

7 H. H. Votaw, Mrs. H. H. Votaw, “An Echo from the India Conference,” The Welcome Visitor,” Feb 15, 1905, 1

8 W. A. Spicer, “A Mission to the Santals,” Review & Herald, July 8, 1902, 13

9 W. A. Barlow, “Simultala,” Eastern Tidings, September 1904, 35

10 Advisory Committee of Seventh-day Adventists, March 29, 1903, 15, Southern Asia Division archives

11 Freida Haegert, “Obituary,” Eastern Tidings, Aug 15, 1926

12 W. W. Miller, “Little Tulsi,” Youths Instructor, Oct 2, 1906, 5

13 W. W. Miller, “Not Forgotten,” Eastern Tidings, Nov 1, 1905, 6

14 W.A. Barlow, “From Darkness to Light,” Review & Herald, Nov 1, 1923, 20

15 15L.G.Mookerjee, “UntiltheDayDawn,” Eastern Tidings, Nov 15, 1942, 5

16 16The Missionary Worker, March 4, 1908, 40.



고든 크리스토 윌리엄의 후계자에게 인도받아 1930년에 개종한 시물타라 사업가 P. B. 크리스토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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