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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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은 삶의 많은 부분에서 매우 중요하다. 운동선수는 이를 잘 알기에 자신의 경기력을 향상하고자 끊임없이 훈련하며 0.25초 더 빨리, 몇 센티미터라도 더 멀리 나아가려 애쓴다. 결혼식에서 해야 할 맹세를 장례식장에서 하는 사람은 없다. 신랑·신부의 결혼 서약은 때에 맞아야 한다. 건강도 타이밍과 직결되어 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하게 먹고 자고 운동한다. 그는 이런 습관으로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타이밍은 영적인 삶에도 중요하며 이 타이밍은 선한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복되게 하려고 설정하신 패턴과 리듬을 따른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주일의 끝에 오는 24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우리 삶의 질서이며 동시에 우리처럼 하나님이 주신 생명 체계 구성의 일원인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시간 속에 설계하신 날이다.
계획표와 달력에 지배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느긋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님이 짧은 기간 이 땅에서 보낸 삶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죄와 고통과 파괴로 얼룩진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선하고 완전한 창조의 근간이 되는 안식일의 본을 따라 서두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시간
태초에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지구와 태양계를 말씀으로 존재케 하셨을 때 성경은 아침과 저녁이라는 리듬에 대해 언급한다(창 1장).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죄가 나타난 뒤에도 시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복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 수단이며 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전도서 3장 1-11절에서는 상반되는 두 사례를 나열하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을 설명한다. 구약 학자 자크 두캉은 이 성경 본문을 주석하면서 “성경에 처음 기록된 은혜는 시간에서 발견된다.”고 썼다. “시간을 파괴적인 힘으로 보았던 그리스 철학자들과 달리 고대 히브리인들은 시간 속에서 삶을 보았다. 따라서 솔로몬이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1절) 말한 것은 인간에게는 때에 알맞은 행동 시기가 있다는 뜻이 아니며 사건들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결정론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도 아니다. ‘모든 것(범사)’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 전치사 ‘레(~)’는 이 모든 시간 사건 즉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로 여겨야 한다고 암시한다.”1
안식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 선물을 의미심장하게 나타내고 있다. 안식일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비롯한 피조물이며 그분의 은혜와 구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신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제한받지 않으시지만 그분은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완벽한 시간을 정해 두셨다.
때가 차매
성육신의 경이로움은 우리 삶의 차원을 초월하는 분이자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시간 속으로 들어와 시간의 제약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4-5절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는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대한 예언적 시간표에 맞추셨고, 사탄의 반복된 방해에도 그 시간표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서두름도 없었다. 예수님은 정확한 장소로 정확한 시간에 오셨다. 하나님이 자신을 기꺼이 제한하신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본성이 드러난다. 우리의 시간에 맞추어 무한하신 분이 한계를 정하셨는데 원수와 그의 세력들이 아무리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은 절대 늑장 부리지도 서두르지도 않으신다. 이러한 사실은 급박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큰 확신을 준다.
예수의 시간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시간 속에서 사셨는가? 먼저 1세기 사람들은 21세기의 우리와는 다르게 시간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시계가 없던 시절의 그들의 삶은 시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대략적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기차나 비행기 시간표도 없었다. 삶의 리듬이 더 완만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것을 초 단위로 계획하지 말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여유를 최대한 확보하라는 우리를 향한 도전과 부르심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삶에도 우리의 삶처럼 매우 바쁜 순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8장 41-56절의 사건이다. 예수께서 어느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무리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 시끄러운 소리 그리고 가버나움의 혼잡한 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해 보라.2 마치 모두가 예수님께 무언가를 원하는 듯이 보인다. 그때 회당장 야이로의 매우 긴급한 요청이 들린다. 누가는 그를 “회당장”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그가 중요한 인물임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체면을 잊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와 달라고 간청한다. 그의 어린 딸이 죽음 직전에 놓여 있어 시간의 촉박함이 느껴진다. 상황은 긴급했고, 예수님은 거의 자신을 압박하는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신다.
마치 심한 교통 체증과도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예수는 매우 시급한 일을 위해 가고 계셨다.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던 중 갑자기 예수께서 멈추신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치유된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예수님은 이 순간이 여인과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키우는 중요한 순간임을 보시고 발걸음을 멈추어 시간을 내신다. 누가복음 8장은 이 만남의 장면을 43절부터 48절까지 자세히 다루면서 예수님이 누가 자신을 만졌는지 묻는 과정을 묘사한다. 베드로가 빠르게 지적한 대로 사람들이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그 질문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예수님은 시간을 내어 물으신다. 결국 그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이 과정 또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여인은 자신의 간증을 전하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격려하신다.
누가는 예수께서 여전히 말씀하고 계실 때 소식 하나가 전달됐다고 진술하면서 시간의 긴박감을 강조한다. 더 심각한 문제로 예수에게 도움을 청했던 야이로는 여인이 멈칫거리며 이야기하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그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49절)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고 야이로의 마음에 평안과 용기를 주며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절).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이라면 중요한 기회를 날려 버린 듯한 이 대목에서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예수께서 상황의 급박성을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신 듯싶고 소녀를 치유해 또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기적을 행할 소중한 기회를 놓치셨다고 느낄 것이다. 소녀를 치료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방해를 받고 금쪽같은 기회를 놓친 듯이 보여도 예수는 야이로에게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하신다. 시간에 관해서도 말씀하시는 듯하다. 예수님은 긴박함에 끌려다니기를 거부하셨다. 급한 일이 진정으로 중요한 일을 압도하거나 그 가치를 흐리게 하도록 그냥 두지 않으셨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도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는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켜 슬픔에 잠긴 부모에게 되돌려주신다. 보기와 달리 그분은 재앙을 막는 일에 더디신 게 아니었다. 민첩한 대응으로 믿음을 길러 주셨고 자신의 타이밍을 믿게 하셨다. 생명의 시여자인 그분은 이 기적으로 무리의 마음에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셨다.
하늘의 리듬을 따라서
시간에 관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 놀라운 자원은 우리가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다. 시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명확한 교훈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신다.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한 시간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모든 시간 심지어 예언의 시간까지 손에 쥐고 계시며 서두르는 법이 없으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시간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신다. 예수님은 공간 속에서 살며 시간에 종속되기 위해 오셨고 그분의 삶은 우리가 시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중요한 점을 보여 준다. 예수의 삶은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시간이 우리를 압박하도록 놔두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준다. 우리는 긴급한 것과 중요한 것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이 차이를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희생하면서 급한 일에 계속 쫓길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끊임없는 긴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걸으며 살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고 제자들이 급한 일로 찾을 때도 예수는 이른 아침이나 어둔 밤의 조용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보내셨다.
새로운 리듬을 익히기란 쉽지 않다. 음악가들은 음악 도중 특히 노래를 부르다가 리듬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주 우리에게 급한 일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볼 특별한 하루를 주신다. 이때가 리듬을 바꾸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재점검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일과표를 체크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키우는 것이 수많은 성취보다 더 중요하다. 어떻게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삶을 정리할 수 있을까? 하루 24시간, 매주 7일 동안 우리를 압박하는 기기들의 비현실적인 요구에서 한 걸음 물러서 보는 건 어떨까? 알림을 꺼 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기기를 내려놓고, 주위의 소리를 듣고, 감정을 느끼고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하늘의 울림에 귀 기울이기로 선택해 보라. 급한 일에 쫓기는 삶에서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다. 마치 삶의 통제력을 상실한 듯싶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절대 늦거나 서두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라는 확신 가운데서 쉰다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급한 일도 내려놓을 수 있다.
1 Jacques Doukhan, “Ecclesiastes,” in Andrews Bible Commentary, ed. Ángel M. Rodríguez et al. (Berrien Springs: Andrews University Press, 2020), 798.
2 누가는 이 사건의 현장이 가버나움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9장 1절에서는 예수가 “자기 동네”로 돌아오셨다고 암시하는데 마태복음 4장 13절에 비추어 보면 이곳은 가버나움으로 보인다.
샹탈 J. 클링바일(Ph.D.), 제럴드 A. 클링바일(D.Litt.) 30년간 교수, TV 진행자, 편집자, 부부장으로 재림교회를 섬겼다. 현재 독일의 함부르크 근처에 거주하며 한자동맹합회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