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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엘렌 지 화잇

Ⅳ. 진씨의 책의 사상적 오류들 J. 베틀 크릭 위생병원 건축에 관한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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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베틀 크릭 위생병원 건축에 관한 계시

1.  진씨의 주장

진씨는 1867년 베틀크릭 건강개혁 요양원 건축과 관련하여 엘렌 G. 화잇이 상반된 기별을 주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제임스 화잇의 주장에 따라 요양원을 헐게 하여 11,000달라의 손실을 보게 하였다고 한다(144-145 쪽).

2.  사건의 전말

남북 전쟁 이후 교회 지도자들은 거의 병약하였다.  녹슬어서 없어지는 것보다 닳아져서 없어지겠다는 선구자들은 건강 생활의 원칙들을 철저하게 준수하지 않은 채로 살아 왔다.  동분서주하며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던 제임스 화잇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은 동시 다발적으로 병으로 쓰러졌다.  당시 명성을 날리던 단스빌 요양원에서 정양 생활을 하여야 했으나, 신앙적 관심 결여, 호외활동 제한, 무염식 강조, 휴양과 정신 치료를 위하여 카드놀이, 댄스, 극장 가기 등을 처방한 동 요양원의 프로그램에 만족하지 못했다.  엘렌 G. 화잇은 1865년 크리스마스 계시 중에서 건강개혁과 신앙적인 건강요양원 건립의 필요성에 관한 기별을 받았다.  그는 1866년 대총회에서 건강개혁 기별을 전하였다.  대총회 지도자들은 이 기별에 호응하였고 건강 잡지 The Health Reformer를 발행하고 건강개혁기관을 창설키로 결의하였다.  소수의 재림신도로 건강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66년 봄에 동 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병약한 몸으로 대총회장직을 맡고있던 제임스 화잇은 이 새로운 기구에 힘을 쏟기 어려워 당시 미시간 합회장이었던 J. N. 러프보로우로 하여금 추진케 하였다.  베틀크릭 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들의 2,625 달라 모금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년 5월에 서부건강개혁요양원(Western Health Reform Institute)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이러한 기구에 관한 법규가 없어 베틀크릭 후원자들은 규정까지 제정하였다.  동 기관은 이사회의 관리체제 하에 있다가 곧 증권사에 합병하여 1,000 달라를 서명 받았다.  요양원 사업을 처음 시도하는 일이어서 노하우도 없었고, 자금 부족,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열악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새로운 건물(25,000 달라 소요)이 절실히 필요하였던 것은 당연하였다.  이 일을 추진한 지도자들은 Review and Herald지를 통하여 대대적 홍보를 통하여 배당금이 보장된 주식 투자 형식으로 큰 호응도를 얻어냈다.1867년 2월 19일 자 RH 참조.
그리하여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시켜 갔다.  이 일은 영리 추구에 기본 모티브가 있어 자선적 성격이 강조되기 어려웠다.

이 확장 프로젝트는 하나님 보시기에 소망스럽지 못하였다.  직원들도 다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고, 몰려오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세속적 마인드가 파고들었고, 영적인 것 보다 물질적인 것이 더 판쳤다.  “형제” “자매” 칭호 대신 Mr.와 Mrs.가 사용되었다.  아침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잔디밭이나 실내에서 게임과 오락에 열중하였다.  질펀하게 누워 쉬는 일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어느새 이 재림교회 요양원은 또 다른 단스빌 요양원과 같이 되어 갔다.  엘렌 G. 화잇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초기부터 여러 번 경고하여 운영 방향을 전환하도록 기별을 보냈다.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1865년 당시에 본_____에 있는 기관은 미국에서 가장 좋은 것이었다. 환자의 치료에 관한 한, 그들은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환자들에게 댄스와 카드놀이를 장려하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정반대가 되는 극장과 세속적 오락의 장소에 가도록 권장한다.

오늘날 배틀크릭에 있는 건강 기관과 관련된 사람들은, 그들이 중요하고 엄숙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과, 신앙과 오락 문제에 있어서는_____에 있는 기관의 의사들을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많은 점에서 그들을 따라감으로 이 위대한 사업의 고상한 특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는 것을 보았다. 만일 이 사업에 관련된 자들이 높은 신앙적 견해에서 그들의 사업을 보지 않고, 건강의 회복만을 위하여 환자들을 취급하는 기관들을 지도하는 자들의 이론과 행동을 본받기 위하여 현대 진리의 고상한 원칙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우리의 기관은 타락한 이론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기관보다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더 못 받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고 고통받는 인간의 복리를 위하여 함께 조화롭고 사심 없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일할 의사들을 발견하기가 쉬운 문제가 아니므로, 매우 광범위한 사업이 짧은 기간에 성취될 수 없을 것을 보았다.  이 사업을 통하여 달성되어야 할 큰 목적이 건강뿐만 아니라 병든 육체와 마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완전함과 거룩함의 정신임을 언제나 뚜렷하게 명심해야 한다. 이 목적은 단순히 세속적 견해로 일함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일으켜서, 육체뿐만 아니라 나이 어리고 경험이 없는 자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죄로 병든 심령까지 고쳐 주는 의사로 이 사업에 종사하도록 그들의 자격을 갖추어주실 것이다.“1T 554.

이러한 메시지에 대하여 베틀크릭 사람들은 화잇 부부를 근거 없이 비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때는 J .N. 앤드루즈가 대총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린빌의 작은 농장에서 일하며 휴양한 제임스 화잇이 건강을 되찾아 오랜만에 화잇 부부는 베틀크릭에 돌아와 보니 요양원은 물질주의 거품으로 인기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요양원에 대한 구조 조종을 하여 감축하도록 권고하였다.  이것은 요양원의 경기를 부양하려는 사람들을 낙심케 한 일이 되어 그 권고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요양원의 수입은 교회의 건강 복음전도에 대 재난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새 건물 공사는 중단되고 건축자재를 팔았다.  이 일로 요양원은 수천 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다.Arthur Whitefield Spalding, Origin and History of Seventh-day Adventist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61, 1:373)

868년 봄에 건강을 되찾은 제임스 화잇은 교회 행정에 복귀하였다. 엘렌 G. 화잇은 주식 투자 방식의 운영에서 탈피하여 자선적 기관으로 구조 조정을 하도록 재촉하였다.  1868년 대총회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경영진을 개편하고 기부금으로 운영하도록 결의하였다.  병원을 자선적 특징을 지닌 단체로 구조조정하고 교인들에게 호소도 하여 부채를 곧 갚았다.  요양원 직원들의 새로운 헌신과 신앙의 각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원수들은 주식투자의 이익을 보지 못한 원망을 하면서 화잇여사를 비판하는 말들을 하게 되었다.  병원을 확장할 때에는 유자격 의사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내실을 기하였다.  화잇 부부는 후에 켈록(J. H. Kellogg)을 의과대학에 보내는 등 재림교회의 신앙적인 의사 양성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선교 병원으로서 구실을 하여 갔다. 

3.  진씨 비평이 간과하고 있는 점

a.  서부건강개혁요양원(Western Health Reform Institute)이 세워지게 된 것은 엘렌 G. 화잇이 1866년 대총회에서 호소한 결과였다.  확장 기금 25,000 달라는 당시 대총회 1년 예산의 7배나되는 거액이었다(RH 27:196 참조). 이 금액은 1년이 지난 후에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 요양원 개원 4개월 째에 모금 호소가 있었다. RH 지(1867, 1, 29)에는 25,000 달러라는 금액은 최소한도의 금액에 불과하다는 식의 홍보하는 기사가 나돌았다. 이 때는 25,000 달러의 절반 정도가 서약하고 만불 정도가 주식 투자로 들어 온 정도였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엘렌 G. 화잇의 제한된 표현의 증언을 자기들 목적 달성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그 사용은 엘렌 G. 화잇이 마치 영리추구를 위한 투자를 인정이나 한 듯한 인상을 주게 된 것이다.   

b.  엘렌 G. 화잇은 1865년 크리스마스날에 받은 계시 내용(건강개혁 필요성, 요양원 설립 필요성, 건강잡지 발행 필요성)을 모두 다 쓸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요양원 프로젝트 지원 호소를 위한 글을 써 달라는 위촉을 받고 엘렌 G. 화잇은 요양원 설립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요양원 사업의 가치와 중요성 및 금전적 지원을 호소하는 글을 증언 11호에 담았다(1T 492-493). 그러나 충분한 시간 결여로 증언 11호에서 건강 요양원 설립과 그 운영 및 특성에 관하여 완벽하게 다룰 수 없었다. 따라서 증언 12호는 불완전한 형태의 글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더 잘 제시되어 있다. 예언자는 여기에서 기다림의 교훈을 배워야할 필요성을 체득하였다.1903, Letter 135; 1T 563.

남편의 병간호를 위하여 베틀크릭을 떠나 있는 동안에 요양원 지도자들은 동 요양원 사업을 재림교회의 신앙적 특성과 조화시켜 발전시키기보다는 단스빌 요양원 모델에 따라서 발전시켜 갔고 더구나 주식 투자식의 경영 체제로 꼴지어 갔다. 교회는 당면한 중차대한 일을 세심한 배려 없이 진행시켜간 것이었다.  증언 12호 내용이 출판된 것도 아니어서 일반 백성이나 요양원 책임자들은 증언 12호의 내용을 아직 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병원 간부진이 1867년 1월 22일 25,000 달라에 대한 호소를 하는 기사가 출간된 같은 달에  제임스 화잇은 증언 11호가 수일 내에 출판될 것을 알리면서 건강 기관에 관한 기사가 수록된 증언 12호가 곧 출간될 것을 덧 부쳤다. 그리하여 건강기관 책임자들이 엘렌 G. 화잇이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의료기관 설립에 관한 빛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요양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어서 엘렌 G. 화잇의 빛의 지원을 받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렌 G. 화잇은 건강기관에 관하여 11호에서 몇 가지를 기사화 한 것이 과오였다고 고백한 것이다.Ibid., 563. 그리고 “기관 문제를 너무도 성급하게 강요하기 위하여 나타낸 기질은 내가 지금껏 감당해 온 가장 무거운 시련들 중 하나로 발전하였다”Ibid., 564. 라고 하면서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기 위하여 증언을 사용한 사람들이 그 증언으로 감동을 먼저 받았을 것 같으면 사태가 이 지경이 안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c.  엘렌 G. 화잇의 다음 기별은 엘렌 G. 화잇이 처음부터 요양원을 크게 하지 말고 훌륭한 의사들과 조력자들을 둔 작은 규모로 운영하여야 하고, 자금 여력이 있는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확장할 것을 권고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배틀크릭에 있는 건강 기관의 시설 범위에 관하여, 나는 전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처음에는 작은 기관을 가지고, 훌륭한 의사들과 조력자들의 수급에 따라, 그리고 자금이 확보되는데 따라, 또한 환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여 조심스럽게 확장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셋째 천사의 기별의 원칙과 겸손의 정신에 엄격히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도 보았다.”1T 558.
요컨대, 진씨는 이상에서 묘사한 여건들을 무시하고 마치 엘렌 G. 화잇이 과오를 범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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