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엘렌 G. 화잇은 누구인가?" F. "존경할 수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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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존경할 수밖에 없지요"
W. F. 얼브라잇(William Foxwell Albright, 1891-1971)은 미국에서, 아마도 전 세계에서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25세 때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후 50년 동안 단과대학과 종합대학, 그리고 개신교, 로마 카톨릭, 유대교의 신학교로부터 25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고학, 성경 그리고 근동에 관한 저술을 800여개 이상 썼으며, 1950년대 존스 홉킨스 대학(전에는 Alger John)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한 학생이 엘렌. G. 화잇의 글을 소개하였다. 그의 호기심은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그 유명한 고고학자는 엘렌. G. 화잇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주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책 석기시대로부터 기독교까지에서 얼브라잇은 지난 250년 동안 믿을 만한 예언자로 꼽히는 5명중 한 사람으로 화잇 여사를 들었다.William Foxwell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second edition (Baltimore: Johns Hopkins Press, 1957), pp. 18, 19.
전통적으로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면서 아주 편안한 때가 없었다. 그들이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유명하지는 않았다. 구약의 마지막 책 속에서(예수의 날로 제정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자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슬프게 썼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註 “계속적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예언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註 “치료”)할 수 없게 하”(대하 36:15,16)였다.
예수께서는 예언자들이 자기 고향에서 흔히 대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얄궂은 사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마 13:57).
엘렌 화잇 역시 그랬다. 많은 재림신도들이 화잇의 증거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다. 이에 반하여 화잇과 종교가 같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마치 얼브라잇 박사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말씀의 지혜, 아름다움, 그리고 능력을 인정하였다. 이 장에 포함된 증인들은 재림교회 교인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비 재림교회 교인들로부터 온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화잇 여사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명예를 안겨주었다.
1960년대 미국 방송회사 뉴스 논평인이고 미국 신문사에 특별한 기사를 제공하는 칼럼니스트인 폴 하비는 엘렌 화잇에 관하여 16문단으로 된 특종을 썼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래 전, 한 백년 전에 엘렌 G. 화잇이라 불리우는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연약했었다. 그리고 단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3학년까지도 마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술적인 훈련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건강한 생활”이라는 주제의 많은 기사들과 책들을 기록하면서 살았다.
기억해 보라. 이 때는 의사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수술을 실시하고 방혈(放血)을 했을 때이다. 이 시대는 미개에 가까운 의학 무지의 시대였다. 그러나 엘렌 G. 화잇은 그녀가 제시했던 많은 원칙들 가운데 거의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영양에 관한 주제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기록했다.From Lima, Ohio, News, Aug. 11, 1960; cited in Notes and Papers Concerning Ellen G. White and the Spirit of Prophecy, seventh printing (Washington, DC: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1974), pp. 193, 194.
하비는 동물성 지방보다는 올리브 기름을 선호한 그녀가 얼마나 올바른지를 지적했다. 우리는 정제된 흰 밀가루는 영양가가 부족하다는 그녀의 지혜를 지금에야 인정하고 있다. 소금 과다사용의 위험과 불규칙한 식사는 위험하다는 그녀의 경고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60년 그녀의 저술에서 증명되지 않은 두 가지 진술이 있었다. 하나는 빵을 만들 때 단지 밀만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곡식을 사용하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채식주의에 관한 것이다."Perhaps We Should Reread What Ellen White Taught," Today's Food, vol. 5, No. 4 (Winter, 1960), p. 8.
9년 후 칼럼니스트 하비는 미국 전지역의 그의 신문 독자들에게 화잇 여사에 대하여 새롭게 썼다.
재림 신자들 가운데는 뇌졸증, 호흡기 질환, 암 등의 발병률이 낮다는 사실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진보된 과학적 발견들이 1세기 전에, 이 놀라운 자그마한 여인인 엘렌 화잇이 기록하고 가르진 것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충성스러운 자의 신앙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내일의 과학적 발견들이 계속하여 화잇을 지지하게 된다면, 내일의 의사들이 처방하게 될 것을 살펴보자.
엘렌 화잇은 과식에 대해 충고한다. 또한 심한 다이어트에 대해서도 충고한다(“극단으로 나가지 말라”). 설탕을 가능한 한 적게 쓰라(그는 설탕이 위장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곡물, 야채, 과일 특별히 사과를 권했다(“사과는 어떤 과일보다도 가장 좋다”).
그는 고기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커피, 차 그리고 안됐지만 핫 비스킷도 좋지 않다.
만약 그가 하는 이런 권면들이 과격하게 들린다면, 이러한 권면들에 대해 1863년에는 어떠한 소리를 들었어야 했는지 상상해 보라. 현대 과학은 점점 진행되면서 “그녀가 옳았다”고 말한다.Today's Food, vol. 14, No. 4 (Winter, 1969), p. 8.
1959년 콜롬비아 사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으려고 공부하던 한 대학원생이 플로렌스 스트레이트메이어 박사(Dr. Florence Stratemeyer)의 개인 장서에서 엘렌 화잇의 책 교육을 발견하였다. 뛰어난 교육자이며, 교육학 교수인 스트레이트메이어 박사는 워싱톤 D.C에 있는 재림교인 교사들의 집회에서 강연을 하기로 초대되었다. 강연 가운데,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에 엘렌 G. 화잇의 책 교육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시대의 변환기에 쓰여진 이 책은 그 시대를 5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이 교육을 3년밖에 받지 못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것임을 알고서는 놀랐다.
그 책의 철학적 넓이와 깊이에 탄복했다. 균형진 교육, 조화된 개발, 원칙에 따른 사고와 행동에 대한 개념은 진보된 교육적 개념들이었다.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는 목적과 부모의 책임교육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자제력을 강조하는 것은 세상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상들이다.
화잇 여사는 물론 현대적 용어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 여사는 저서에서 교과과정(Curricul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 책 어느 부분에서는 중요한 교과과정의 원리들을 다룬다. 여사는 전인 교육 즉 지적, 신체적, 영적인 면의 조화로운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적인 발달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과 정서개발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우리의 변화하는 사회에서 사고와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하다. 이러한 조화로운 개발이 매우 크게 필요 되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구성원들이 화잇 여사의 저서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보유하고, 그 말씀을 학교의 교육적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중심으로 삼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Review and Herald, August 6, 1959; cited in Notes and Papers Concerning Ellen G. White and the Spirit of Prophecy, seventh printing, p. 316.
스트레이트메이어 박사는 초기의 교육적 견해뿐만 아니라 교육이 발간된 1903년 당시의 교육적 견해에도 의심할 바 없이 익숙해 있었다. 만약 화잇 여사가 단지 과거의 유행했던 다양한 견해들을 되풀이했다면 그 콜롬비아 대학교수는 감히 공공연하게 화잇 여사의 견해가 진보적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다마가와 대학(Tamagawa University)의 미즈노(Tsunekichi Mizuno) 교수는 (일본 교육부 사회교육국 국장이고 도쿄 과학 박물관의 전직 관장) 부모, 교사, 학생들에게 교육 책을 추천했다.
그는 그 책을 “신교육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 가장 적절한 도서”라고 일컬었다.
엘렌 G. 화잇이 영감을 받아 쓰여진 책 교육은 근 50년 동안 전 세계를 통하여 학생, 교사와 부모들에게 봉사와 기쁨을 가장크게 안겨준 것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내가 일리노이즈 대학(University of Illinois)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원어로 된 책을 읽는 특권이 주어졌다. 나는 그 당시 그 책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미즈노 교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 이후로 일본에 있는 교육자들에게 그 책을 추천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 되었다. 그 책이 마침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진정한 나의 기쁨이다.Cited in Notes and Papers, pp. 314, 315.
남부유럽의 어느 교육부장관이 콜롬비아 대학 사범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인 신생국가를 위해 가장 새롭고 가장 좋은 교육정책과 프로그램을 펼치기 위하여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자기 나라에 귀국한 직후 라도사블예비쉬(Raja R. Radosavlyev-ish) 박사는 종교적, 도덕적 교육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세르비안 언어로 저술된 그 책은 주립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는데 이는 그 나라 언어로 출판된 종교교육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세르비아에 있는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그 책을 읽었을 때, 그들은 즉시 그것이 엘렌 G. 화잇의 교육을 번역한 것이며, 세르비아 교육부 장관이 서문을 썼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신간의 80%는 엘렌 G. 화잇의 글로부터 직접 따온 것이었다.
William A. Spicer, The Spirit of Prophecy in the Advent Movement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37), pp. 81, 82; see also transcript of television sermon "She Never Owned a Crystal Ball,: by George E. Vandeman, It is Written productions, Thousand Oak, California, for more details than it was politic to include in the 1937 account by Spicer.
그것은 표절인가? 누가 그 훌륭한 사람의 동기를 알겠는가? 만약 콜톤(Charles Caleb Colton)이 “모방은 아첨의 최상 형태이다”라고 한 말이 정확한 것이라면 재림신도들은 진정으로 자부심을 느껴야만 할 것이다.
1965년 독일 사회학자 시몬(Irmgard Simon)박사는 Münster에서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간했다. 그 논문은 재림교회와 엘렌 화잇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실제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다시피 했고 건강상태도 좋지 않아 고통을 받았던 한 여인이 어떻게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중요하고도 심도 깊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많은 대답이 주어졌다.
그녀의 강한 믿음, 힘찬 신앙적 권능, 계시적 능력--이런 것들이 그녀를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으로 확고하게 해주는 사항들임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받았다는데서 그 여인은 힘과 끈기와 인내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고상한 이상들로 가득 찼는데,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구현하였고 또한 그녀의 동료들의 삶 속에서도 구현되기를 기대했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이 거의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그녀는 사람을 몸과 혼과 영을 소유한 전인적 존재로 보는 현대적 방법으로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녀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있었으며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동분서주 활동하였다. 그녀는 교회들이 수십 년 안에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도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했다.
하나님과 강력한 무아지경의 연합을 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 땅에서의 현실을 잊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생애에서 실로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과 씨름했다. 엘렌 G. 화잇은 오로지 한가지 목적으로 살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살찌우고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교인들이 잘 준비되어서 “남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지식을 강력하게 실행하면서도 지나치게 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종류의 광신주의를 견책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환경들에 적합한 방법이었다. 엘렌 G. 화잇은 현명하고도 통솔력이 있는 여성이었으며, 강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형성한 운동을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살았다. 그녀는 세상을 멀리했으며, 세상의 속박을 깨뜨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목적에만 전념하였다.
이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더구나 핵심적인 인물로, 특별히 여자일 경우 혹독한 비평을 받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Translated from German by Ingemar Linden in "Would Catholics Have Canonized E. G. White?" Northern Light, September, 1968, p. 7.
시몬 박사는 여러 시대를 통하여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 교회에 잘 알려진 사람 중에 하나인지 아닌지 그 의문에 대하여 토론했다. 시몬은 엘렌 화잇의 놀라운 경험과 계시에 대하여 적절한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엘렌 화잇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아니고 로마가톨릭교인이었다면 엘렌 화잇이 성인(聖人)으로 당연히 잘 떠받들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엘렌 화잇에게 주어진 신비로운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그녀가 비록 교회에서 받은 공식적인 직책은 없어도 그 계시가 추종하는 자들에게 힘있는 광채가 되어 교회 안에서 지도자가 되도록 자리 매김을 해 주었다. 그녀는 교회와 하나님 사이의 기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녀를 통해 교인들이 거룩한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엘렌 G. 화잇이 재림교회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있다. 그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엘렌 G. 화잇은 여러 가지 운동의 창시자들처럼 인간 육신의 연약함 위에 그들 자신을 높이는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고 종으로 남아있어 하나님께 속한 영예를 찬탈하지 않았다. 재림교회는 아직 엘렌 G. 화잇의 영감 위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유산대로 살아만 간다면 재림교회에는 미래가 있는 것이다.Ibid.
화잇 여사가 사망했을 때 비종교적 출판사들의 적지 않은 논평을 받았다. 비 재림교인 신문사 편집인이 엘렌 G. 화잇의 생애와 그녀의 업적의 중요성에 관하여 공평하게 논평한 전형적인 두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Toledo(오하이오)의 간행지 Blade의 편집자는 “현대의 여 예언자”에 관해 다음의 글을 썼다.
화잇 여사는 … 초기에 예언의 선물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재림교회가 조직됨을 더불어 그녀는 곧바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그 영향력은 그녀가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70년간 지속되어 왔다. 설교자로서의 재능 말고도 그녀는 조직력과 행정력이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활용하였다. 교회가 번영했으며, 많은 나라를 통해 확산되기까지 성장했다. 대학교들이 세워졌고, 의과대학들, 병원들이 설립되어 교사와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화잇 여사는 주목할 만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초창기적 삶을 살았지만 완고하지 않았으며 확실히 성인 시 되어질 수 있었던 열화도 피하였다.
Editorial, "A Modern Prophetess," Toledo Blade, July 19, 1915, cited in Review and Herald, May 27, 1971, p. 24.
뉴욕시 간행지 Independent는 처음으로 그 결과에 대해 사설로 썼으며, 그녀의 삶과 업적에 대해 이렇게 논술했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들은 완전히 성경의 영감적인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제칠일안식일재림운동은 이 외 다른 어떤 것에도 근거를 둘 수 없었다. 그리고 예언의 선물은 진리를 굳게 붙잡은 “남은교회”에게 주는 약속으로서 기대되었던 것이었다. 이 신앙은 삶을 더욱 순결하게 하며, 열정을 더욱 지속적이게 한다. 그리스도인중 어느 누구도 종교적 열정이나 도덕적인 성품에 있어 그들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업은 베틀크릭에서 1853년에 시작됐다. 그리고 그들은 전 세계에 37개 출판소를 가지고 있으며, 80여 개의 다른 언어로 서적이 번역되었고, 연간 200만불어치 출판을 할 정도로 성장해 왔다. 그들은 지금 70개의 대학들과 중 고등학교 그리고 약 40여 개의 병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에 엘렌 G. 화잇은 영감을 주어왔고 안내자가 되어왔다. 여기에 훌륭한 기록이 있으며, 그녀는 큰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녀는 정말 신적 계시를 받았는가? 그녀는 정말 예언적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 성령에 의해 선택된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흥분된 상상력의 희생자였는가? 왜 우리는 대답해야만 하는가? 성경의 교리가 그 결론일 것이다. 하여튼 그녀는 그녀의 계시와 그녀의 믿음 안에서 절대적으로 충실했다. 그녀의 생애는 그것들을 가치 있게 했다. 그녀는 어떤 영적 교만도 보이지 않았으며 부정한 이득을 찾지도 않았다. 그녀는 바로 그런 생애를 살았으며 미국의 정신을 계승할 가장 칭찬할 만한 값진 여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Editorial, "An American Prophetess," The Independent, New York, August 23, 1915, pp. 249, 250; cited in Arthur L. White, Ellen G. White: The Later Elmshaven Year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2), p.444.
W. F. 얼브라잇(William Foxwell Albright, 1891-1971)은 미국에서, 아마도 전 세계에서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25세 때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후 50년 동안 단과대학과 종합대학, 그리고 개신교, 로마 카톨릭, 유대교의 신학교로부터 25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고학, 성경 그리고 근동에 관한 저술을 800여개 이상 썼으며, 1950년대 존스 홉킨스 대학(전에는 Alger John)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한 학생이 엘렌. G. 화잇의 글을 소개하였다. 그의 호기심은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그 유명한 고고학자는 엘렌. G. 화잇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주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책 석기시대로부터 기독교까지에서 얼브라잇은 지난 250년 동안 믿을 만한 예언자로 꼽히는 5명중 한 사람으로 화잇 여사를 들었다.William Foxwell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second edition (Baltimore: Johns Hopkins Press, 1957), pp. 18, 19.
전통적으로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면서 아주 편안한 때가 없었다. 그들이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유명하지는 않았다. 구약의 마지막 책 속에서(예수의 날로 제정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자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슬프게 썼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註 “계속적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예언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註 “치료”)할 수 없게 하”(대하 36:15,16)였다.
예수께서는 예언자들이 자기 고향에서 흔히 대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얄궂은 사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마 13:57).
엘렌 화잇 역시 그랬다. 많은 재림신도들이 화잇의 증거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다. 이에 반하여 화잇과 종교가 같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마치 얼브라잇 박사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말씀의 지혜, 아름다움, 그리고 능력을 인정하였다. 이 장에 포함된 증인들은 재림교회 교인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비 재림교회 교인들로부터 온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화잇 여사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명예를 안겨주었다.
1960년대 미국 방송회사 뉴스 논평인이고 미국 신문사에 특별한 기사를 제공하는 칼럼니스트인 폴 하비는 엘렌 화잇에 관하여 16문단으로 된 특종을 썼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래 전, 한 백년 전에 엘렌 G. 화잇이라 불리우는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연약했었다. 그리고 단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3학년까지도 마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술적인 훈련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건강한 생활”이라는 주제의 많은 기사들과 책들을 기록하면서 살았다.
기억해 보라. 이 때는 의사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수술을 실시하고 방혈(放血)을 했을 때이다. 이 시대는 미개에 가까운 의학 무지의 시대였다. 그러나 엘렌 G. 화잇은 그녀가 제시했던 많은 원칙들 가운데 거의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영양에 관한 주제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지고 기록했다.From Lima, Ohio, News, Aug. 11, 1960; cited in Notes and Papers Concerning Ellen G. White and the Spirit of Prophecy, seventh printing (Washington, DC: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1974), pp. 193, 194.
하비는 동물성 지방보다는 올리브 기름을 선호한 그녀가 얼마나 올바른지를 지적했다. 우리는 정제된 흰 밀가루는 영양가가 부족하다는 그녀의 지혜를 지금에야 인정하고 있다. 소금 과다사용의 위험과 불규칙한 식사는 위험하다는 그녀의 경고가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60년 그녀의 저술에서 증명되지 않은 두 가지 진술이 있었다. 하나는 빵을 만들 때 단지 밀만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곡식을 사용하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채식주의에 관한 것이다."Perhaps We Should Reread What Ellen White Taught," Today's Food, vol. 5, No. 4 (Winter, 1960), p. 8.
9년 후 칼럼니스트 하비는 미국 전지역의 그의 신문 독자들에게 화잇 여사에 대하여 새롭게 썼다.
재림 신자들 가운데는 뇌졸증, 호흡기 질환, 암 등의 발병률이 낮다는 사실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진보된 과학적 발견들이 1세기 전에, 이 놀라운 자그마한 여인인 엘렌 화잇이 기록하고 가르진 것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충성스러운 자의 신앙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내일의 과학적 발견들이 계속하여 화잇을 지지하게 된다면, 내일의 의사들이 처방하게 될 것을 살펴보자.
엘렌 화잇은 과식에 대해 충고한다. 또한 심한 다이어트에 대해서도 충고한다(“극단으로 나가지 말라”). 설탕을 가능한 한 적게 쓰라(그는 설탕이 위장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곡물, 야채, 과일 특별히 사과를 권했다(“사과는 어떤 과일보다도 가장 좋다”).
그는 고기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커피, 차 그리고 안됐지만 핫 비스킷도 좋지 않다.
만약 그가 하는 이런 권면들이 과격하게 들린다면, 이러한 권면들에 대해 1863년에는 어떠한 소리를 들었어야 했는지 상상해 보라. 현대 과학은 점점 진행되면서 “그녀가 옳았다”고 말한다.Today's Food, vol. 14, No. 4 (Winter, 1969), p. 8.
1959년 콜롬비아 사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으려고 공부하던 한 대학원생이 플로렌스 스트레이트메이어 박사(Dr. Florence Stratemeyer)의 개인 장서에서 엘렌 화잇의 책 교육을 발견하였다. 뛰어난 교육자이며, 교육학 교수인 스트레이트메이어 박사는 워싱톤 D.C에 있는 재림교인 교사들의 집회에서 강연을 하기로 초대되었다. 강연 가운데,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에 엘렌 G. 화잇의 책 교육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시대의 변환기에 쓰여진 이 책은 그 시대를 5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이 교육을 3년밖에 받지 못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것임을 알고서는 놀랐다.
그 책의 철학적 넓이와 깊이에 탄복했다. 균형진 교육, 조화된 개발, 원칙에 따른 사고와 행동에 대한 개념은 진보된 교육적 개념들이었다.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는 목적과 부모의 책임교육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자제력을 강조하는 것은 세상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상들이다.
화잇 여사는 물론 현대적 용어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 여사는 저서에서 교과과정(Curricul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 책 어느 부분에서는 중요한 교과과정의 원리들을 다룬다. 여사는 전인 교육 즉 지적, 신체적, 영적인 면의 조화로운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적인 발달에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과 정서개발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우리의 변화하는 사회에서 사고와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하다. 이러한 조화로운 개발이 매우 크게 필요 되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구성원들이 화잇 여사의 저서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보유하고, 그 말씀을 학교의 교육적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중심으로 삼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Review and Herald, August 6, 1959; cited in Notes and Papers Concerning Ellen G. White and the Spirit of Prophecy, seventh printing, p. 316.
스트레이트메이어 박사는 초기의 교육적 견해뿐만 아니라 교육이 발간된 1903년 당시의 교육적 견해에도 의심할 바 없이 익숙해 있었다. 만약 화잇 여사가 단지 과거의 유행했던 다양한 견해들을 되풀이했다면 그 콜롬비아 대학교수는 감히 공공연하게 화잇 여사의 견해가 진보적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다마가와 대학(Tamagawa University)의 미즈노(Tsunekichi Mizuno) 교수는 (일본 교육부 사회교육국 국장이고 도쿄 과학 박물관의 전직 관장) 부모, 교사, 학생들에게 교육 책을 추천했다.
그는 그 책을 “신교육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 가장 적절한 도서”라고 일컬었다.
엘렌 G. 화잇이 영감을 받아 쓰여진 책 교육은 근 50년 동안 전 세계를 통하여 학생, 교사와 부모들에게 봉사와 기쁨을 가장크게 안겨준 것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내가 일리노이즈 대학(University of Illinois)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원어로 된 책을 읽는 특권이 주어졌다. 나는 그 당시 그 책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미즈노 교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 이후로 일본에 있는 교육자들에게 그 책을 추천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 되었다. 그 책이 마침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진정한 나의 기쁨이다.Cited in Notes and Papers, pp. 314, 315.
남부유럽의 어느 교육부장관이 콜롬비아 대학 사범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인 신생국가를 위해 가장 새롭고 가장 좋은 교육정책과 프로그램을 펼치기 위하여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자기 나라에 귀국한 직후 라도사블예비쉬(Raja R. Radosavlyev-ish) 박사는 종교적, 도덕적 교육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세르비안 언어로 저술된 그 책은 주립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는데 이는 그 나라 언어로 출판된 종교교육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세르비아에 있는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그 책을 읽었을 때, 그들은 즉시 그것이 엘렌 G. 화잇의 교육을 번역한 것이며, 세르비아 교육부 장관이 서문을 썼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신간의 80%는 엘렌 G. 화잇의 글로부터 직접 따온 것이었다.
William A. Spicer, The Spirit of Prophecy in the Advent Movement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37), pp. 81, 82; see also transcript of television sermon "She Never Owned a Crystal Ball,: by George E. Vandeman, It is Written productions, Thousand Oak, California, for more details than it was politic to include in the 1937 account by Spicer.
그것은 표절인가? 누가 그 훌륭한 사람의 동기를 알겠는가? 만약 콜톤(Charles Caleb Colton)이 “모방은 아첨의 최상 형태이다”라고 한 말이 정확한 것이라면 재림신도들은 진정으로 자부심을 느껴야만 할 것이다.
1965년 독일 사회학자 시몬(Irmgard Simon)박사는 Münster에서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간했다. 그 논문은 재림교회와 엘렌 화잇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실제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다시피 했고 건강상태도 좋지 않아 고통을 받았던 한 여인이 어떻게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중요하고도 심도 깊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많은 대답이 주어졌다.
그녀의 강한 믿음, 힘찬 신앙적 권능, 계시적 능력--이런 것들이 그녀를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으로 확고하게 해주는 사항들임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받았다는데서 그 여인은 힘과 끈기와 인내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고상한 이상들로 가득 찼는데,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구현하였고 또한 그녀의 동료들의 삶 속에서도 구현되기를 기대했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들이 거의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그녀는 사람을 몸과 혼과 영을 소유한 전인적 존재로 보는 현대적 방법으로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녀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있었으며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동분서주 활동하였다. 그녀는 교회들이 수십 년 안에 해결되리라고 기대하지도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했다.
하나님과 강력한 무아지경의 연합을 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 땅에서의 현실을 잊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생애에서 실로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과 씨름했다. 엘렌 G. 화잇은 오로지 한가지 목적으로 살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살찌우고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교인들이 잘 준비되어서 “남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지식을 강력하게 실행하면서도 지나치게 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종류의 광신주의를 견책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환경들에 적합한 방법이었다. 엘렌 G. 화잇은 현명하고도 통솔력이 있는 여성이었으며, 강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형성한 운동을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살았다. 그녀는 세상을 멀리했으며, 세상의 속박을 깨뜨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목적에만 전념하였다.
이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더구나 핵심적인 인물로, 특별히 여자일 경우 혹독한 비평을 받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Translated from German by Ingemar Linden in "Would Catholics Have Canonized E. G. White?" Northern Light, September, 1968, p. 7.
시몬 박사는 여러 시대를 통하여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 교회에 잘 알려진 사람 중에 하나인지 아닌지 그 의문에 대하여 토론했다. 시몬은 엘렌 화잇의 놀라운 경험과 계시에 대하여 적절한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엘렌 화잇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아니고 로마가톨릭교인이었다면 엘렌 화잇이 성인(聖人)으로 당연히 잘 떠받들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엘렌 화잇에게 주어진 신비로운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그녀가 비록 교회에서 받은 공식적인 직책은 없어도 그 계시가 추종하는 자들에게 힘있는 광채가 되어 교회 안에서 지도자가 되도록 자리 매김을 해 주었다. 그녀는 교회와 하나님 사이의 기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녀를 통해 교인들이 거룩한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엘렌 G. 화잇이 재림교회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있다. 그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엘렌 G. 화잇은 여러 가지 운동의 창시자들처럼 인간 육신의 연약함 위에 그들 자신을 높이는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고 종으로 남아있어 하나님께 속한 영예를 찬탈하지 않았다. 재림교회는 아직 엘렌 G. 화잇의 영감 위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유산대로 살아만 간다면 재림교회에는 미래가 있는 것이다.Ibid.
화잇 여사가 사망했을 때 비종교적 출판사들의 적지 않은 논평을 받았다. 비 재림교인 신문사 편집인이 엘렌 G. 화잇의 생애와 그녀의 업적의 중요성에 관하여 공평하게 논평한 전형적인 두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Toledo(오하이오)의 간행지 Blade의 편집자는 “현대의 여 예언자”에 관해 다음의 글을 썼다.
화잇 여사는 … 초기에 예언의 선물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재림교회가 조직됨을 더불어 그녀는 곧바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그 영향력은 그녀가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70년간 지속되어 왔다. 설교자로서의 재능 말고도 그녀는 조직력과 행정력이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활용하였다. 교회가 번영했으며, 많은 나라를 통해 확산되기까지 성장했다. 대학교들이 세워졌고, 의과대학들, 병원들이 설립되어 교사와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화잇 여사는 주목할 만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초창기적 삶을 살았지만 완고하지 않았으며 확실히 성인 시 되어질 수 있었던 열화도 피하였다.
Editorial, "A Modern Prophetess," Toledo Blade, July 19, 1915, cited in Review and Herald, May 27, 1971, p. 24.
뉴욕시 간행지 Independent는 처음으로 그 결과에 대해 사설로 썼으며, 그녀의 삶과 업적에 대해 이렇게 논술했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들은 완전히 성경의 영감적인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제칠일안식일재림운동은 이 외 다른 어떤 것에도 근거를 둘 수 없었다. 그리고 예언의 선물은 진리를 굳게 붙잡은 “남은교회”에게 주는 약속으로서 기대되었던 것이었다. 이 신앙은 삶을 더욱 순결하게 하며, 열정을 더욱 지속적이게 한다. 그리스도인중 어느 누구도 종교적 열정이나 도덕적인 성품에 있어 그들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업은 베틀크릭에서 1853년에 시작됐다. 그리고 그들은 전 세계에 37개 출판소를 가지고 있으며, 80여 개의 다른 언어로 서적이 번역되었고, 연간 200만불어치 출판을 할 정도로 성장해 왔다. 그들은 지금 70개의 대학들과 중 고등학교 그리고 약 40여 개의 병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에 엘렌 G. 화잇은 영감을 주어왔고 안내자가 되어왔다. 여기에 훌륭한 기록이 있으며, 그녀는 큰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녀는 정말 신적 계시를 받았는가? 그녀는 정말 예언적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 성령에 의해 선택된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흥분된 상상력의 희생자였는가? 왜 우리는 대답해야만 하는가? 성경의 교리가 그 결론일 것이다. 하여튼 그녀는 그녀의 계시와 그녀의 믿음 안에서 절대적으로 충실했다. 그녀의 생애는 그것들을 가치 있게 했다. 그녀는 어떤 영적 교만도 보이지 않았으며 부정한 이득을 찾지도 않았다. 그녀는 바로 그런 생애를 살았으며 미국의 정신을 계승할 가장 칭찬할 만한 값진 여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Editorial, "An American Prophetess," The Independent, New York, August 23, 1915, pp. 249, 250; cited in Arthur L. White, Ellen G. White: The Later Elmshaven Year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2),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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